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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상세정보
인물명
송병선[宋秉璿]
호(號)
동방일사[東方一士]|연재[淵齋]
시호(諡號)
문충[文忠]
생몰년
1836 - 1905
시대
조선
본관
은진[恩津]
저술
근사속록[近思續錄], 무계만집[武溪謾輯], 연재집
인물설명
자는 화옥[華玉]. 송시열의 9세손. 백부 달수[達洙]에게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함. 1878년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음. 1905년 일본이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리고 그해 국권피탈에 통분하여 독약을 마시고 자결함. 후에 의정[議政]에 추증됨. 문충사[용동서원]에 배향됨.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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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고문헌(1,211)
저서정보(4)
10월4일에 이인조(李寅祖)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댁에 보낸 간찰(簡札)
모년(1885년 이후) 10월 4일에 보령의 외사촌 이인조(李寅祖)가 원계의 송병선(宋秉璿)에게 보낸 편지. 집안일로 18세난 딸의 혼처로 나온 김씨 신랑감의 이름과 주소를 알려달라 하고 묘표(墓標) 묻으면 곧 파내는 자를 징치하는 문제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
1853년에 이용순(李容純)이 회덕 석남의 송면수(宋勉洙)께 보낸 간찰(簡札)
1853(계축)년 3월 17일에 부여 규암의 이용순(1826- )이 회덕 석남의 송면수(1813-1855)에게 보낸 편지. 수신자의 아들 송병선의 관례를 축하하고 또 이달 스무날 쯤에 있을 장례(1852년 10월에 죽은 송병선의 여동생 즉 金永穆의 처로 추정됨)를 걱정하였으며 이용순 자신의 재취 혼례는 예정된 날에 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1853년에 종제 송병서가 연재 선생께 보낸 간찰
1873년(계유) 2월 8일에 남곡의 종제 송병서가 오산의 송병선에게 보낸 편지이다. 봄 추위 속의 안부 인사와 함께, 산소를 이장하시는 날짜를 몰라 못 가보았는데 인편에 서신도 보내주지 않으시어 매우 답답하다고 말하고, 자신은 아버님 병환이 심해져 애가 타며, 해묵은 담증과 체증이 발작하여 신음하고 있음을 전하고, 회덕에서는 치서(穉瑞) 집에 우환이 있고 천포(泉浦)는 안녕하며, 옥(玉) 아우와 진위(振威) 형가 회시(會試)를 보러 가는데 시험장에 가지고 갈 재료가 걱정된다 하였다.
선생집예설초[先生集禮說鈔]
[선집예설(先集禮說)]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예설(禮說)을 초록한 필사본이다. 곧, [연재집]에서 예설에 관련된 부분만 초록한 것으로 ‘연재선생문집예설초목록(淵齋先生文集禮說抄目錄)’에는 초록한 각각의 작품과 수록된 위치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첫 장에 필사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함경남도 정평군에 거주한 호가 인암(仁菴)인 한예근(韓禮根)이다.
양기록[養氣錄]
[양기록(養氣錄)]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관동지역을 유람하며 지은 책으로 필사본이다. 저작시기에 대해, 저자의 동생인 송병순(宋秉珣)이 지은 [연재행장(淵齋行狀)]을 살펴보면, 1868년에 저자가 금강산 등 관동지역을 유람하며 여러 유람기를 남겨 [양기록]이라 명칭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어당(峿堂) 이상수(李象秀, 1820~1882)의 서문이 있고 다수의 유람 시, 유람기문이 있고 본문 곳곳에는 수정과 가필(加筆)한 흔적이 보이는바, 필사 이후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연재행장[淵齋行狀]
[연재행장(淵齋行狀)]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행장으로 [연재집(淵齋集)] 수록된 행장을 초록한 필사본이다. 원래 [행장]은 [연재집] 권53에 있지만 필사본에는 권52로 기록되어 있는바, 필사 당시 오류로 보인다. 저자는 송병선의 아우인 송병순(宋秉珣)이다.